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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복동 선수는 1920년 ‘경성시민 운동대회’ 자전거 경주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의 자전거 선수는 거의 자전거 점포 직원들이었다. 엄복동 선수도 평택 출신으로 평택 서울 간을 다니며 자전거 행상을 했던 것이다. 후일 ‘엄복동이냐, 조수만 이냐’ 하는 노래까지 유행하였는데, 이 조수만 선수는 이류 선수권에서 2등으로 입상한 사람이다. 당시 에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하여 등급을 정하였다. 한편 조수만 선수는 청파동에서 자전거 점포를 운영하며, 후일 후배 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어떤 대회에서는 일본인 심판들의 부당한 판정으로 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일본 선수를 제치고 엄복동 선수가 독주하게 되자, 일본인 심판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우승을 주지 않기 위해 일몰을 구실로 경주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복동 선수는 격분한 나머지 우승기를 꺾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몰매까지 가하여 한때 관중의 항거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 때 최고의 우승자에게는 우승기와 양복,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후 엄복동 선수는 ‘조일 일류 선수권대회’ ‘조선 일류 선두 책임 경주 대회’ ‘일류 20바퀴 경주’ 등에서 연승함으로써 그를 추종할 선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전거 경주를 통해 조선 남아가 일본인들을 압도한 쾌거였던 것이다. 엄복동은 자전거 선수로서 어린 아이들도 잘알고 있는 영웅적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방대회가 성행하였고 엄복동 선수가 그 대회에 출전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관중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엄복동 선수의 인기는 그가 48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1932년 4월 20일에 열린 ‘전 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서울 개최) 1만 미터 경주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신문들은 ‘비장 엄복동 선수 노익장’ 이라며 대서 특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엄복동 선수 외에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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